농구 코트의 기술이 진로의 핵심이 될 때
농구를 해보신 적이 있나요? 농구 규칙 중에는 공을 잡은 상태에서 한 발은 축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다른 발을 요리조리 움직여 방향을 전환하는 '피벗(Pivot)'이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최근 경영학에서도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기업이 기존 사업의 핵심 역량, 즉 고정된 한 발은 그대로 유지한 채 시장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최근 주식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된 일본의 한 '변기 회사' 이야기는 이 피벗의 정수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과연 화장실의 변기와 최첨단 인공지능(AI)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이 흥미로운 기업의 사례를 통해,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가져야 할 진로 설계의 지혜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아날로그 기술이 AI 반도체의 심장이 되다
일본의 최대 위생도기 제조사인 TOTO(토토)는 최근 경제 시장에서 단순한 변기 회사가 아닌 'AI 메모리 수혜주'로 재평가받으며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반전의 비밀은 바로 변기를 굽는 '정밀 세라믹 가공 기술'에 숨어 있었습니다.
TOTO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기를 만들며 도자기를 매끄럽고 단단하게, 그리고 열에 강하게 구워내는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마침 챗GPT 같은 인공지능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교집합이 발생합니다.
반도체를 만들 때는 영하의 극저온 상태에서 얇은 실리콘 웨이퍼를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이 고정해야 합니다. 이때 온도 변화에도 변형이 오지 않는 '세라믹 소재의 고정판'이 필수적으로 쓰입니다. 시장은 TOTO가 가진 세라믹 기술이 이 정밀 공정에 완벽하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세상을 바꾼 기업들의 공통점, 피벗
TOTO처럼 자신들이 가진 '숨겨진 무기'를 활용해 전혀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둔 사례는 주변에 무척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AI의 뇌를 만드는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원래 화려한 3D 게임 그래픽을 끊김 없이 보여주기 위한 컴퓨터 부품을 만들던 곳이었죠.
그런데 수많은 픽셀을 동시에 계산하는 이 그래픽 기술이, 수십억 개의 데이터를 한 번에 학습해야 하는 AI의 구조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결국 엔비디아는 방향을 틀어 전 세계 AI 칩 시장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 되었습니다.

사진 필름 회사였던 후지필름(Fujifilm)은 어떤가요?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지만, 필름의 주원료가 '콜라겐'이며 사진이 빛바래지 않게 하는 '항산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이를 피부 노화 방지에 적용해 화장품 및 헬스케어 기업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전 세계 기업이 쓰는 업무용 메신저 '슬랙(Slack)' 역시, 원래는 야심 차게 만들었다가 실패한 온라인 게임의 사내 개발자용 소통 도구에서 출발했습니다. 게임이라는 껍데기는 버렸지만, 소통의 효율성이라는 핵심 기술을 축으로 삼아 글로벌 유니콘 기업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 아이의 진로에 피벗을 적용하려면
이러한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 방식에서, 우리 중고등학생들은 진로와 성장에 대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교학점제 시대에 과목을 선택하고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채워나갈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이기도 합니다.
첫째, 나만의 '단단한 축'을 만드세요
TOTO의 세라믹 기술이나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기술처럼, 내가 남들보다 몰입해서 잘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을 하나 갈고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학적 논리력이든, 화학적 물질 탐구 능력이든, 코딩이든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어, 2022 개정 교육과정의 과학 교과 중 '화학'이나 '고급 화학'을 수강하며 물질의 구조와 성질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경험은 TOTO처럼 신소재를 개발하는 든든한 축이 됩니다. 한 분야에서 확실한 깊이를 만들어 두면, 나중에 어떤 방향으로 피벗을 하든 무너지지 않는 중심축이 되어 줍니다.
둘째, 시야를 넓혀 세상의 변화에 귀 기울이세요
내가 가진 능력이 처음 의도한 곳에서만 쓰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후지필름이나 슬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기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캐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매진하되, "이 능력이 다른 곳에 쓰인다면 어떨까?"라는 열린 질문을 멈추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단한 축 하나를 세우고 주변의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여러분에게도 세상이 전혀 예상치 못한 멋진 기회를 제안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나만의 '코어 기술'을 다지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방향을 트는 유연함을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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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이러한 융합적 시야를 기를 수 있습니다. 정보 교과의 '정보과학'을 통해 문제 분석과 알고리즘 설계를 배우고, 기술·가정 교과의 '창의 공학 설계'를 수강하며 기존 기술을 새로운 문제 해결에 적용해 보는 경험을 쌓는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이 과정 자체가 곧 피벗의 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