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연습생"이 전 세계를 홀리기까지
2026년 2월, 대한민국 뉴스는 온통 이 한 사람의 이야기로 도배되었습니다. 한국계 아티스트 이재(EJAE).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루미'의 목소리로 빌보드 핫 100 정상을 8주간 지키더니, 기어코 그래미 어워드 트로피까지 들어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K-팝의 새로운 아이콘'이라 부르며 환호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잔혹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무려 12년을 연습생으로 보냈습니다. 소녀시대가 데뷔하고, 엑소가 돔구장을 채울 때 그녀는 지하 연습실에 있었습니다. 결과는 '데뷔 무산'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걸그룹 트렌드에 맞지 않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너무 큰 키. 10대와 20대 청춘을 통째로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습니다.

많은 학생과 학부모님들이 진로를 고민할 때 '실패'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 학과에 갔다가 적성에 안 맞으면 어쩌지?",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가 떨어지면 인생 망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재의 드라마틱한 반전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12년의 실패는 정말 시간 낭비였을까요? 아니면 최고의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을까요?
실패한 아이돌, 성공한 아티스트
이재의 성공 비결을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됩니다. 아이돌 데뷔라는 문이 닫혔을 때, 그녀는 좌절하여 멈추는 대신 방향키를 살짝 틀었습니다. 무대 위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면 음악을 만드는 '메이커'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작곡을 공부했고, 레드벨벳의 'Psycho' 같은 히트곡을 만들며 프로듀싱 역량을 쌓았습니다.

이재에게 기회가 온 것은 그녀가 가진 '단점' 덕분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루미'는 낮에는 아이돌, 밤에는 악마 사냥꾼인 거친 캐릭터였습니다. 전형적인 걸그룹 목소리로는 소화할 수 없는 이 배역에, 이재의 허스키한 보이스는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작곡가로서 쌓은 곡 해석력, 미국 생활로 얻은 영어 실력이 더해져 폭발적인 시너지를 낸 것입니다.
'명사'를 쫓는 아이, '동사'를 쫓는 아이
여기서 우리는 진로 설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아이돌이 꿈이에요", "저는 의사가 꿈이에요". 이렇게 장래 희망을 '직업 명칭(명사)'으로만 정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이재의 꿈이 오직 '아이돌(명사)'이었다면, 그녀의 인생은 데뷔가 무산된 시점에서 '실패'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동사)"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이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게 안 되면 작곡가로, 혹은 애니메이션 성우로 방법을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학과 선택,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이 관점을 대학 입시와 진로 선택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학생에게 단순히 '실용음악과'만 추천하는 건 1차원적인 접근입니다.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금, 음악을 업(業)으로 삼기 위한 길은 훨씬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글로벌콘텐츠학과'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어떤가요? 이재처럼 직접 노래하는 것을 넘어, 콘텐츠가 유통되는 플랫폼을 이해하고 기획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혹은 심리학을 전공하여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 서사를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보다 '어떤 역량 조합(Skill Set)을 갖췄느냐'입니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동사형' 준비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당장 아이돌 학원에 등록하거나 유학을 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나만의 무기'를 하나씩 쟁여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1. 언어는 생존 도구다
이재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던 건 결국 영어였습니다. K-콘텐츠가 글로벌화되면서, 한국적인 감성을 외국어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습니다. 단순히 시험 점수를 위한 영어가 아니라, 내 콘텐츠를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 능력이 필요합니다.
2. '제작자'의 마인드 갖기
소비자나 플레이어에 머물지 말고 메이커가 되어봐야 합니다. 춤을 좋아한다면 춤만 추지 말고 영상을 직접 찍어 편집해 보고, 게임을 좋아한다면 게임 리뷰 블로그를 써보게 하십시오. 이 과정에서 기획력, 편집력, 작문력 같은 전이 가능한 기술(Transferable Skills)이 길러집니다. 이 기술들은 나중에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든 든든한 보험이 됩니다.

진로는 직선주로가 아닙니다. 지금 겪고 있는 성적 하락, 입시 실패, 혹은 막막함이 어쩌면 더 큰 도로로 나가기 위한 우회로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명사(직업)에 갇히지 말고, 동사(행동)로 꿈을 꾸십시오. "나는 의사가 될 거야" 대신 "나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정의할 때, 아이의 미래는 병원이라는 건물 밖으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핵심: 꿈을 직업명에 가두지 말자. 역량을 쌓으면 직업은 저절로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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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팩트 체크: 물론 현실은 냉정합니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뜬다"는 말은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재가 살아남은 건 단순히 버텼기 때문이 아닙니다. 연습생 기간 동안 춤과 노래만 한 게 아니라, 작곡을 배우고 영어를 익히며 '플랜 B'를 위한 무기를 만들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